[WIKI 프리즘] 미국, 신군부의 광주민주화항쟁 진압 방조 직후 경제협력 프로젝트 본격화 의혹

최정미 기자= 5.18 광주민주화항쟁 진압 과정에서 미국이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는 주장들에 대해 미국 정부와 보수 학계는 일관적으로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반면 진보적 학자들과 언론들은 미국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포린폴리시인포커스(FPIF. www.fpif.org)는 진보적인 측에 속한다. 특히 팀 셔록은 5.18광주민주화항쟁 진압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조명해 온 언론인이다.

팀 셔록은 FPIF 기고를 통해 “새로운 미국 문서들로 1980년 한국의 광주 항쟁에 대한 독재 정권과 워싱턴의 공모가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팀 셔록은 미국 정부가 광주항쟁의 진압을 방조한 직후 6백만달러 규모의 미국의 핵발전 설비와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수출하기로 결정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다음은 팀셔록이 FPIF에 기고한 글이다.

지난 주, 80년대 후반 최종적으로 승리를 얻은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을 고취시켰던 중대 사건, 광주 시민 항쟁이 30주년을 맞이했다. 이 항쟁으로 인해 수백명이 사망한 광주에서 엄숙한 추모식의 형태로 기념식이 열렸으며, 지난 10년 간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도자 이명박 대통령의 대표단을 포함 좌우익 양측의 정치 지도자들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 기념식에 한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미국은 거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광주 사태는 미국 최악의 외교 정책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침묵이 납득할 만하다. 광주 항쟁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이래 한미 관계에 가장 심각한 위기를 불러왔고, 미군을 등에 업은 한국군에게 최대의 난관이었다. 한국군은 1961년부터 효과적으로 자국을 통제했고, 베트남에서 미군과 함께 싸웠다. 그러나 지미 카터 대통령의 행정부는 인권에 대한 공공 책무와 한국 독재정부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스스로 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선택을 했고,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하려는 한국 정부의 결정을 지지했다.

저널리스트로서 나는 항쟁이 일어난 첫 날부터 광주에 깊이 관여해왔다. 1980년 5월 오리건 대학의 학생 운동가였던 나는 광주에서 벌어진 군의 잔학한 행위들에 대한 최초의 현장 보고를 기독교 인권 단체와 미국 선교단이 몰래 배포하는 것을 도왔다. 이후 나는 광주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몇 안 되는 저널리스트 중 한 명이 됐다. 1990년대를 지나오면서 나는 반란으로 이끈 사태에 대해 미국 정부와 미군은 관련이 없다는 미국의 공식 해명에 반하는 거의 4천 건에 달하는 기밀해제 서류들을 입수했다.

▷새로운 증거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초기에 내가 요구했던 정보공개법 하에 입수한 또 다른 문건들을 공개하려 한다. 이 문건들에는 내가 1996년에 입수했지만 최근 추가로 기밀해제가 된 9건의 국무부 핵심 전문과 입수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 한국에 대한 CIA 비밀 보고서들(대폭 편집됐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이 포함돼 있다.

1980년 한국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해 1996년에 처음 보도한 나의 초창기 자료들은 이 문건들이 더해지면서 더 늘어났다. 한국의 위기가 미국의 안보 이익을 불안정하게 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란 사태(미국과의 동맹을 타도한 혁명)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 카터 행정부는 한국군이 학생과 노동자 시위자들을 진압하는 데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면서, 지나친 무력 사용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광주 시민들이 군의 만행에 반격했을 때, 미 행정부는 진압을 위해 미군의 지휘 하에 있는 한국 군대의 파견을 승인했다. 카터의 행동은 한국에서 거의 8년 이상의 억압적인 군정의 길을 닦는 것을 도운 것이었고, 이 시기에 지속된 한국 내 반미 감정의 물결을 일으키는 촉발점이 된 셈이었다.

새 문건들은 왜 카터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밝혀줬다. 미국 정보국은 당시 동아시아에 대규모 파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79년 가을 한국이 정치적 투쟁으로 가고 있었던 징후를 완전히 놓쳤다. 격동적이었던 산업화와 그 이면에 노동자 조직과 학생 반체제인들에 대한 대규모의 탄압이 있던 당시의 18년은 쉽게 불붙을 수 있는 혼합체를 만들었고,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의 암살로 인해 이것이 발화점에 이르게 됐다. 암살자는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박정희가 한국을 혁명으로 몰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CIA는 여러 달 전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의 반체제인들에 대한 전망’이라는 제목의 한 분석 보고서에서 야당과 노동자와 학생들의 저항이 조직적이지 않고 영향력 없으며, 민주주의의 발전과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이들의 요구는 대중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일축해버렸다. CIA는 ‘박정희가 1980년대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확고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히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경제 침체나 정치적 과잉반응이 야당들을 연합으로 몰고 갈 수 있고, 박정희에게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한 견고한 지지기반이 없을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럼에도 CIA는 한국의 인구 3천 7백만에서 적극적인 반정부인들은 수 백에서 수 천명이기 때문에 기회는 거의 없다고 했다. 게다가 한국의 일반적인 근로자들은 학생 시위를 미숙함과 책임감 부재의 반영으로 보고 있고, 반체제적인 정치 문제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분석은 엄청난 착오였다. 1979년 10월 수만 명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산업 도시 부산에서 일어난 반박정희 시위에 합류했다. 다음해 서울과 그 밖의 도시들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불법 파업을 조직했고, 박정희의 후계자들에 반대하여 매일 벌어지고 있던 학생들의 시위에 합류했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생부터 공장 노동자, 택시 기사들까지 거의 5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무장 항쟁에 참여했다.

한국의 정치적 불만의 수위를 예측한 것에 대한 CIA의 실수는 정보국 역사상 최고의 실수 중 하나인 소련의 붕괴 예측에서 보여준 무능력과 맥을 함께하고 있다. 국무부 전문들도 비슷한 실수를 보여준다. 35년 간의 끈끈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얼마나 한국의 일상과 단절돼 있었으며, 18년 동안의 군정과 노동자 탄압으로 휘청거린 사회의 정치적 원동력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가 없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전두환의 쿠데타로 광주 항쟁이 촉발되기 두 달 전인 1980년 3월에 뚜렷이 보여졌는데, 당시 미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이 1급 비밀 평가서를 워싱턴에 보냈다.

그는 ‘군사 쿠데타나 대규모 학생 노동자 시위 같은 위험한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고 썼고, ‘군사 개입의 위협은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한국의 정치 발전에 반드시 따르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부산에서 시위가 일어나는 동안 ‘문제를 일으킨 노동자들과 그 외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는 대신 어느 정도의 실질 임금 삭감을 받아들임으로써 한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수용할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도 덧붙였다. 또 한번의 엄청난 오판이 참사를 불러오게 됐다.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 광주는 단지 냉전시대의 추상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는 민주당의 강경한 외교 정책에 관한 실례이기도 하다. 1979년과 1980년 한국의 결정을 핵심적으로 주도한 사람들은 리처드 홀브루크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다. 선망의 지위 국무장관을 위한 민주당의 영원한 총아 홀브루크는 현재 힐러리 클린턴 국무부의 고위급 관료이다. 카터의 보좌관인 브레진스키는 이라크 전쟁의 반대와 신보수주의 부시 집단의 외교 정책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뉴 아메리카 재단 같은 워싱턴의 상류 단체들 속에서 확고히 명성을 지켜왔다.

1980년 한국의 위기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동맹인 한국에 대해 오만하고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의 무시를 보여줬다. 홀브루크와 브레진스키는 한국군에 대해 깊은 의혹을 갖고 있던 카터에게 한국 문제의 유일한 대안은 한국 국민들의 민주주의 열망을 엎고 전두환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설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떤 면에서 광주 사태는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냉전 패권 종료와 미국과 아시아의 관계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을 지원해주기로 한 카터의 결정은 많은 한국인들과 아시아인들에게 비극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배신이 됐다. 찰머스 존슨은 2001년 그의 예지적인 명작 <역류 Blowback>에서 이 점을 명시하면서, 내 문서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1956년 여름 헝가리 독립을 억압하면서 소련군이 무자비한 얼굴을 세상에 보여준 것처럼, 군 권력자 전두환과 그의 지지자들을 미국이 지원한 것은 미국의 소위 인권과 법치에 대한 약속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라고 존슨은 논쟁을 펼쳤다. 우리는 여전히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최근 한국 해군 구축함이 받은 공격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한국의 의혹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심화되는 시점에서 왜 그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막대한 영향력을 경계하는지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광주 항쟁

광주 항쟁은 1980년 5월 중순에 시작됐는데, 그 때는 군의 정치 개입을 맹렬히 배격하기 위해 수천 명의 한국 학생들이 서울과 그 외 주요 도시들의 거리로 나온 시기였다. 이 시위들은 충격적인 박정희 암살의 여파로 시작되었다. 6주 뒤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이끄는 한 무리의 군 사령관들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했고, 이들은 완전한 권력을 쥐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CIA와 국무부는 이에 경악과 실망을 금치 못했고, 학생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야당 정치인들은 거리 시위와 미국에 직접 호소하는 것으로 군인들을 저지하려고 했다.

5월 17일, 시위대를 진압하는 데 군대를 이용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워싱턴의 공지를 받은 후, 전두환은 전국적인 계엄령을 선포하고 도시와 교정을 휩쓸며 운동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보냄으로써 커져가고 있던 민주화 운동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된 독재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유명한 남서부 지역 전라도의 한 도시 광주에서는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계엄령에 맞섰다. 5월 18일, 북한 배후의 공산주의 혁명이 드러나고 있다고 지휘관들로부터 경고를 받은 전두환 부대는 광주에서의 이틀 간의 광란을 시작했다.

이 부대는 보통의 군인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특전사 부대로 남북한의 무력 충돌 뒤에 따라올 게릴라전에서 북한인들을 죽이도록 훈련을 받았다. 백주에 공수부대원들이 계엄령에 맞서는 사람들을 때리고 통검으로 찌르고 총을 쏘았다. 이들은 그냥 구경하는 사람들도 공격하고 집까지 쫓아가 죽였다. 공포스럽고 분노를 자아내는 돌격대들의 행위에, 군복무를 통해 총기를 다루는 기술을 습득한 광주 남자들이 시민군을 결성하고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 수십 명의 사상자가 생겨난 전투와 백병전이 이틀 동안 치러진 후, 전두환의 특수 부대는 도시 밖으로 퇴각했다.

이 반란은 일주일 간 광주와 인근 지역에서 집단 공유와 시민 연대를 이끌었는데, 후에 일부 운동가와 역사학자들은 이를 1871년 파리 코뮌과 비교했다. 광주 시민들은 인권을 미국 외교 정책의 중심으로 만들 것임을 공개적으로 약속한 카터 행정부가 전두환의 혐오스런 군사정권보다는 자신들의 편에 설 것으로 기대했다(미국 항공모함이 명령을 받고 광주시를 도우러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는 이 사건이 공포와 증오로 비쳐지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 거의 4만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고, 핵무장 부대가 미국의 냉전 전략의 핵심으로 거점 기지들과 함께 소련과 중국을 둘러싸며 전진 기지에 배치돼 있었다. 불과 서너 달 전, 카터는 북한과 동아시아를 향한 미군의 자세가 틀어질 것을 우려한 보수적인 의원들과 펜타곤의 압박에 의해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그의 1976년 공약을 뒤집는 데 동의했다.

광주 항쟁이 고조에 달한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회의에서 카터 행정부는 운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반란을 막고 조심스레 전두환을 중도적인 상태로 놓기 위해 그가 한미 연합군 하의 정규군을 배치하는 것을 승인한 것이다. 일단 결의가 되자, 카터의 국가안보팀은 정상적인 경제적 관계가 진행될 것이라는 데에 의견 일치를 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핵발전 설비와 엔지니어링 서비스 수입을 위한 6백만 달러의 수출입은행 대출을 한국에 해주는 것도 포함됐다.

전두환의 군대는 몇 시간만에 광주로 이동을 시작했다. 물 샐 틈 없는 군사 경계선이 이미 광주와 인근 지역들을 모든 교신에서 단절시켰다. 군 헬기들이 광주 상공을 비행하며 전남도청을 장악하고 있던 광주 시민군에게 투항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한때 광주 시민 위원회가 미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에게 휴전 협상을 위해 개입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대사관은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5월 27일 이른 아침, 연합군 산하의 한국군이 단숨에 도청으로 진격했고, 재빨리 저항을 진압했다. 군인들은 이 광주 코뮌을 종결시켰고, 이에 연루된 수백 명의 사람들을 체포했다. 6월초 카터 측은 수출입은행의 대출을 승인했고, 한국은 미국의 핵발전 기술을 사는 계획을 진행했다. 이 자금은 미국의 거대 기업인 웨스팅하우스와 벡텔의 주머니로 바로 들어갔다. 1980년 9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됐고, 1981년 1월, 새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을 백악관에 방문하는 최초의 외국 수장으로 선정했다. 한미 관계는 복원됐고, 위기는 전환됐다.

그러나 한국 국민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전두환의 정권 장악은 8년이 넘는 군정의 시작이었다. 이는 또한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지속된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켰는데, 1987년에는 서울과 그 외 도시들에서 수백 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온 몇 주 동안의 대규모 시위로 절정에 이르렀다. 1997년, 민주화 운동은 (광주 출신이자) 오랜 세월 반체제 지도자였던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정점을 찍었다.

민주화 운동에서 요구하는 것 중 하나가 광주에서의 군사 작전에 대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1996년, 전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행정부가 광주에서의 범죄에 대해 전두환과 그의 공모자들을 기소하고 유죄 확정을 받았다. 김대중은 취임 직후 이들을 감형시켜줬다.

▷미국의 원조

나는 처음에 기밀해제 전문에 관해 <저널 오브 커머스 The Journal of Commerce>에 보도했다. 내 기사가 나간 날은 마침 전두환의 첫 재판일과 맞아떨어졌다. 대부분 국무부에서 나온 이 문서들은, 미국이 한국군을 저지하려 했다는 공식 발표와는 반대로, 카터의 고위급 관료들이 한국 장성들에게 5월 17일 쿠데타 전에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 맞서 군대를 이용하겠다는 전두환의 계획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확실히 언급했음을 보여줬다.

내가 국방정보국에서 입수한 문서들은 특전사 부대 배치에 관한 미국의 공식 해명을 뒤집었다. 수 년 동안 미국 정부는 전두환이 군사력을 이용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국방정보국의 문건들은 다른 것을 보여줬다. 미국 정부는 광주 사태가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한국군이 비무장 학생과 노동자 시위에 특전사 부대를 쓸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요하다. 후에 광주에서의 살상에 대해 두 특전사 여단에 책임을 물었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들은 한국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1996년 2월 기고문이 나간 다음날 서울의 미 대사관 앞과 여러 도시들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며칠 동안 뉴스 1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뉴욕 타임즈는, 당시 도쿄 지국장이 니콜라스 크리스토프였는데(후에 중국의 천안문 광장 학살에 대한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전문들을 완전히 무시했고, LA 타임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후에 두 언론사의 기자들로부터 도쿄와 서울의 미 대사관들이 편집자들에게 전문들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고 통지했고, 이들은 충실하게 이 실리 위주의(그러나 완전히 잘못된) 충고를 따랐으며, 새로운 정보에 대해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언론과 정책 입안자들은 기밀해제 서류들로부터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워싱턴 포스트는 신뢰성을 생각해서 이 문서들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지만, 내 기사가 나간 며칠 뒤였고, 추가적인 내용은 전혀 없었다).

수 년 동안 나는 점차 더 많은 문서들을 입수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새 문서들에 관한 기사는 쓰지 않았다. 몇 년 전 국가안보 기록보관소의 도움으로 나는 이전에 공개됐지만 대폭 편집된 10건의 국무부 문서들을 입수했다. 그리고 11년 동안 호소를 한 뒤에야, CIA는 나에게 ‘종료된 정보’라고 부르는 몇 가지 일급 기밀 보고서를 공개했는데, 당시의 위기가 시작된 1979년에 작성된 것들이다. 이 문서들은 이곳에 PDF 형식으로 실려 있어서, 역사학자와 저널리스트, 미국 국민, 한국 국민, 그 날의 진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열람할 수 있다. 이제 내가 짧게 되짚어보겠다.

▷독재자를 지원하다

국무부 문서 중 두 건은 당시 국무장관 사이러스 반스가 이끈 카터 행정부와 박정희 암살 이후의 한국 정부와의 첫 회담을 기술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당시 한국 정부의 혼란의 정도를 보여주는데, 박정희가 한국에서 절대 권력을 쥔 독재자가 된 뒤로는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이 문서들은 위기 발발 때부터 한국 정부 당국자들이 박정희 통치 하에 깊어진 대중 불만을 인식하면서 얼마나 현 상황(박정희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 없는 상황)을 지키려고 노력했는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또한 미군의 지원, 친선, 경제 원조에 대한 한국의 전적인 의존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한 주권국가의 외교부 장관이 ‘우리의 정치 시스템의 다섯 가지 핵심 중 하나가 미국의 영향력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글을 읽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이 회담은 이후 6달 동안의 한미 정책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원래의 기사들에 썼 듯이 홀브루크와 글라이스틴은 한국 정부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돕기 위한 노력을 이끌었고, 한편으로 공개적이고 공정한 선거에서는 승리를 했을(글라이스틴이 한 문건에서 인정을 했 듯) 야당에 군정 종료와 대통령 선거 요구를 절제하도록 충고했다. 국무부 장관 반스가 한국 외교부 장관에게 ‘야당과 갖는 접촉에서 항상 우리는 조심스레 절제를 조언할 것이다’라고 거듭 말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 정부에 대한 대중의 비판에 연루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라고도 덧붙였다.

또한 반스가 한국의 대통령 권한대행과의 면담에서 유보 중인 미국 수출입은행과의 6백만 달러 거래를 언급한 점은 중요하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핵기술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이 대출은 광주 사태 불과 일주일 만에 승인이 났다. 미 국무부와 한국 대통령의 회담에 영리적인 사업 거래가 포함돼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반스는 한국 대통령에게 핵개발 거래가 진정 효과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두 문건에서는 1979년 12-12 사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다루고 있다.

1979년 12월 전두환은 일방적으로 DMZ를 방위하고 있는 한국군에게 서울의 계엄 사령관들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미 연합군의 지휘 체계를 위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기밀해제 전문은 워싱턴의 한국 대사에게 전해진 홀브루크의 직설적인 발언(‘상호 믿음에 심각한 손상이 갔다’)과 함께 전두환의 행동으로 매우 불편해진 미국의 심기를 전한다. 그러나 지휘 체계의 위반에 대한 미국의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홀브루크와 나머지 행정부 관료들은 전두환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한 침묵하고 있기로 동의했다. 전두환은 물론 약속을 깼다.

한 문서에서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이 어떻게 권력을 잡으려고 했는지에 관해 꽤 솔직히 언급했다. 그는 ‘그 장군이 자신의 막후 조종 역할을 군 영역에서 정부와 사회 전체로 확장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뒤인 5월,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의 퇴진이 주된 요구인 평화로운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 데 군사력을 이용해야 된다고 하는 전두환의 편에 섰다. 글라이스틴은 또한 이 전문에서 ‘야당이 선거에서 이기거나, 그럴 가능성이 보여지면, 군은 이를 미리 또는 선거 뒤 쿠데타로 막을 것이다’라고 했다. 전두환이 5월에 김대중과 그 외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고 의회를 폐쇄시킨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건의 또 다른 문서들은 1980년 5월 전두환의 탄압이 있기 일주일 전에 글라이스틴이 전두환과 또 청와대와 가졌던 두 중요 면담에 대한 전체적인 요약을 보여준다. 이 문서들은 글라이스틴(더불어 카터 정부도)이 다가올 탄압의 규모가 만 2천 이상의 전투 경찰이 서울 전체에 포진할 정도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 또한 어떻게 글라이스틴과 그의 측근들이 폭력과 체포의 가능성을 우려했는지에 대해 이전의 전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야당 지도자들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의 탄압에 휘말린 김대중과 그의 반체제 동지 김영삼에게 사리에 맞게 말을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글라이스틴이 1980년 6월 청와대에서 또 한번의 면담을 가진 후에 쓴 마지막 전문은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처음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의미심장하게도 글라이스틴의 주요 걱정은 학생들이 아니라 정권 내에서의 반미 움직임이었다. 글라이스틴은 면담에서 1980년 여름 전두환에 의해 행해진 대대적인 숙청에 대해 미리 들었다. ‘아직도 군 권력자들은 정치적 현장을 충분히 씻어냈다는 만족을 하지 못했지만, 청와대는 이 면담이 극단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그는 오싹한 말을 했다.

이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카터 행정부는 광주 사태 때처럼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유감스러운 미국 외교 역사의 장에 미국이 공모했다는 것에 대한 더 강력한 증거는 없다. 안타깝게도 광주에서 깨닫지 못한 가르침이 바그다드에서 카불, 자카르타까지, 미국이 전략상 인권의 중요성보다 경제적 군사적 관심에 무게를 두고 있는 많은 곳에서 반복돼 왔다. / 팀 셔록 2010.6.1

The Lasting Significance of Kwangju
New U.S. documents reveal Washington’s complicity with dictators around the Kwangju uprising of 1980 in South Korea.

Last week marked the 30th anniversary of the Kwangju Citizens’ Uprising in South Korea, a pivotal event that inspired the Korean democratic movement through its ultimate victory in the late 1980s. In Kwangju, where hundreds died in the uprising, the event was marked by solemn remembrances and the presence of political leaders from both left and right, including representatives of President Lee Myung-bak, South Korea’s most conservative leader in over a decade. But the event drew hardly a passing glance in the United States, which is South Korea’s closest ally.

The silence is understandable, because Kwangju represents U.S. foreign policy at its worst. The uprising created the most severe crisis in U.S.-Korean relations since the Korean War ended in 1953 and was the largest challenge ever to the US-backed South Korean military, which had effectively controlled the country since 1961 and had fought alongside U.S. forces in Vietnam. Yet the U.S. administration of President Jimmy Carter, despite its public commitment to human rights and its vocal criticism of Korea’s authoritarian government, chose the wrong side and supported that government’s decision to put the rebellion down with lethal force.

As a journalist, I’ve been intimately involved with Kwangju since the first days of the uprising. In May 1980, as a student activist at the University of Oregon, I helped distribute some of the first on-scene reports of the military atrocities in Kwangju smuggled out of South Korea by Christian human rights groups and American missionaries. Later that decade, I was one of the only journalists to visit Kwangju and document what had happened there. And over the course of the 1990s I obtained nearly 4,000 declassified documents that repudiated the official U.S. story that American officials and generals had no involvement in the events that led up to the rebellion.

New Evidence

To mark the 30th anniversary, I am releasing another batch of documents obtained under my initial Freedom of Information Act requests. They include nine key State Department cables that I first obtained in 1996 but were further declassified in recent years, and a collection of secret CIA reports on South Korea that took me over 10 years to obtain (they are heavily redacted, as readers will see).

Together, these documents augment my initial findings about the U.S. role in South Korea in 1980, which I first reported in 1996. The Carter administration, concerned that the crisis in South Korea could destabilize U.S. security interests and possibly trigger “another Iran” — a revolution overthrowing a U.S. ally — gave tacit approval to the Korean military to use force to put down student and worker protests, while warning generals not to use excessive force. Then, when the Kwangju citizens fought back against military atrocities, the same officials approved the dispatch of Korean troops under U.S. command to put down the rebellion. Carter’s actions helped pave the way for nearly eight more years of repressive military rule in South Korea and triggered a wave of anti-American feeling throughout South Korea that persists to this day.

The new documents shed considerably more light on why Carter made his decisions. U.S. intelligence, despite a massive presence in East Asia at the time, completely missed the signs that South Korea was heading toward political warfare in the fall of 1979. By that time, 18 years of intense industrialization coupled with massive repression against labor organizers and student dissidents had produced a combustible mix that climaxed on October 26, 1979, with the assassination of dictator Park Chung Hee. His killer was the CIA chief who feared that Park was driving South Korea toward revolution.

But months before, in an entitled “The Outlook for President Park and South Korea’s Dissidents,” the CIA dismissed the worker and student resistance, as well as the political opposition, as unorganized and ineffectual and unable to muster public sympathy for its demands for greater democracy and worker rights. Park, said the CIA, “seems fully capable of retaining his firm grip on power into the 1980s.” But it warned that an economic downturn or political over-reaction could drive the opposition to “coalesce, and [Park] might not have a sufficiently deep reservoir of support to maintain his political position.” Still, chances for that were small, the agency said, because South Korea’s “active dissenters” numbered from “the hundreds to perhaps a few thousand,” in a country of 37 million. Moreover, “the average Korean wage earner” saw student protest as a “reflection of immaturity and lack of ‘real responsibilities,’” and was unlikely to participate in dissident politics.

This analysis turned out to be a colossal mistake. In October 1979, tens of thousands of students and workers joined in anti-Park demonstrations in the industrial city of Pusan. The next year in Seoul and other cities, thousands more workers organized wildcat strikes and joined students in daily demonstrations against Park’s successors. And in Kwangju in May 1980, nearly half a million people, from students to factory workers to cab drivers, took part in the armed rebellion.

The CIA’s failure to anticipate the unrest ranks alongside its inability to predict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as one of the top intelligence blunders in its history. The State Department cables show a similar disconnect; they underscore how, despite 35 years of close ties, US officials had very little contact with everyday Koreans and virtually no understanding of the political dynamics of a society reeling from 18 years of military rule and labor repression. That was underscored in March 1980, two months before Chun’s coup precipitated the Kwangju uprising, when U.S. Ambassador William Gleysteen sent a top secret assessment to Washington.

“The odds of a dangerous disruption, such as a military coup or massive student/worker uprising, do not seem high,” he wrote, adding that “the threat of military intervention will remain a Damocles sword over Korea’s political development for some time.” But, he added, the “workers and others who created trouble” during the Pusan demonstrations “seem prepared to accommodate to Korea’s very difficult economic circumstances by taking some reduction in real income rather than taking to the streets.” Once again, a colossal misjudgment resulted in a catastrophe.

For American progressives, Kwangju is not just an abstract event in the Cold War. It’s also an object lesson in the hard-line foreign policies possible in the Democratic Party. The key players in the Korea decision-making in 1979 and 1980 were Richard Holbrooke and Zbigniew Brzezinski. Holbrooke, a perennial favorite in Democratic circles for the coveted job of secretary of State, is currently a high-ranking official in Hillary Clinton’s State Department. Brzezinski, Carter’s national security adviser, has won a certain claim to fame in fashionable Washington think tanks (such as the New America Foundation) for his opposition to the war in Iraq and his biting critique of the Bush/neoconservative school of foreign policy.

During the Korean “crisis” of 1980, both men displayed an arrogant and almost breathtaking disdain toward their South Korean allies. Holbrooke and Brzezinski were instrumental in persuading Carter — who was deeply suspicious of the Korean military — that his only alternative in South Korea was to support Chun over the democratic aspirations of the Korean people. In a sense, Kwangju marks the end of U.S. Cold War hegemony in East Asia and a turning point in the American relationship with Asia. Carter’s decision to back the generals marked, to many South Koreans and others in Asia, a tragic and incomprehensible betrayal. Chalmers Johnson made this point in his prescient 2001 masterpiece Blowback, which quoted extensively from my documents.

Just like the Soviet suppression of Hungarian independence in the summer of 1956 exposed the thuggish face of Soviet military power to the world, Johnson argued, American backing of the military strongman Chun Doo Hwan and his supporters ripped the face off America’s supposed commitment to human rights and the rule of law. We are still paying the price for that. And even as tensions on the Korean peninsula deepen over South Korean allegations that the North is responsible for the recent attack on a naval destroyer, it’s important to remember why so many South Koreans remain wary of the United States and its tremendous military clout in East Asia.

The Uprising

The Kwangju Uprising began in mid-May 1980, when thousands of South Korean students flooded the streets of Seoul and other major cities to denounce military intervention in Korean politics. The demonstrations had started in the aftermath of the shocking assassination of Park Chung Hee. Within six weeks, a group of army commanders led by Lt. General Chun Doo Hwan, the chief of military intelligence, had taken control of the military and were clearly intent on seizing total power. But, to the surprise and consternation of the CIA and the State Department, students, workers and opposition politicians sought to block the South Korean military through street demonstrations and direct appeals to the United States.

On May 17, after receiving notice that Washington would not stand in the way of using troops to quell the protests, Chun put a stop to the growing movement for democracy by declaring martial law over the entire country, sending army forces to sweep through the cities and campuses to arrest movement leaders. The crackdown was effective in Seoul and other cities. But in Kwangju, a city in Korea’s southwestern Cholla Province well-known for its resistance to centralized, authoritarian rule, students continued to defy the martial law edicts. On May 18, apparently warned by their commanders that a communist revolution backed by North Korea was unfolding, Chun’s troops began a two-day rampage through the city.

These troops were no ordinary army soldiers. They were Special Forces, trained to kill North Koreans during a counterinsurgency war that would follow any armed conflict between North and South. In broad daylight, the paratroopers began beating, bayoneting and shooting anyone who dared to stand up to martial law. The troops attacked bystanders as well, chasing them into their homes and killing them. Horrified and angered by the actions of the storm troopers, the people of Kwangju — the men skilled in firearms because of mandatory stints in the army — formed a citizens’ militia and started shooting back. After two days of combat and hand-to-hand fighting, in which dozens of people were killed and wounded, Chun’s Special Forces turned tail and pulled out of the city.

In Kwangju and other nearby towns in the Cholla region, the rebellion ushered in a week of collective sharing and citizen solidarity that some activists and historians later compared to the Paris Commune of 1871. The Kwangju citizens hoped and expected that the Carter administration, which was publicly committed to making human rights a centerpiece of U.S. foreign policy, would side with them rather than Chun’s hated military junta (rumors even flew that a U.S. aircraft carrier was one its way, with orders to help the city).

Back in Washington, however, these events were viewed with fear and loathing. The United States had nearly 40,000 combat troops in South Korea, and these forward-based, nuclear-armed troops were key to the U.S. Cold War strategy of encircling the Soviet Union and China with military bases. Just a few months before, Carter had agreed to reverse his 1976 campaign promise to withdraw U.S. troops from Korea, after enormous pressure from conservative lawmakers and the Pentagon concerned about upsetting the U.S. military posture towards North Korea and East Asia.

At the peak of the uprising — at a White House meeting on May 22, 1980 — the Carter administration made its fateful decision. It would allow Chun to deploy regular army troops under the U.S.-Korean military command to put down the rebellion, and gingerly push Chun toward “moderation.” Once the situation was resolved, Carter’s national security team agreed, normal economic ties could move forward — including an important $600 million Export-Import Bank loan to South Korea to buy American nuclear power equipment and engineering services.

Within hours, Chun’s troops began moving on Kwangju. A tight military cordon had already cut off the city and its surrounding towns from all communications. Military helicopters began flying over the city urging the Kwangju urban army — which had taken up positions in the provincial capital building in the middle of the city — to surrender. At one point, a Kwangju citizens’ council asked the U.S. ambassador, William Gleysteen, to intervene seek a negotiated truce. But his office coldly rejected the request.

In the early morning of May 27, the Korean troops from the Joint Command shot their way into the provincial capital and quickly put an end to the resistance. The soldiers shut down the Kwangju Commune and arrested hundreds of people who had participated. In early June, Carter’s team approved the Eximbank loan, and South Korea went ahead with its plan to buy U.S. nuclear technology — money that went right into the pockets of the giant U.S. corporations Westinghouse and Bechtel. By September 1980, Chun was president, and in January 1981 incoming President Ronald Reagan chose Chun I as the first foreign head of state to visit the White House. U.S.-Korean ties were restored, and a crisis averted.

But not for the people of South Korea. Chun’s takeover began eight more years of military rule. It also sparked a movement for democracy that lasted throughout the 1980s, culminating in 1987 with huge demonstrations in Seoul and other cities that drew millions of people into the streets for weeks on end. In 1997, the movement reached an apex when Kim Dae Jung, the longtime dissident leader (and a Kwangju native) was elected president of South Korea. One of the demands of the movement was to seek justice for the military’s actions in Kwangju. In 1996, the administration of former opposition party leader Kim Young Sam tried and convicted Chun and his co-conspirators for their crimes in Kwangju. Kim Dae Jung commuted their sentences upon taking office.

U.S. Assistance

I first reported about my declassified cables in The Journal of Commerce, timing my article to coincide with the first day of Chun Doo Hwan’s trial. The documents, mostly from the State Department, showed that — contrary to official statements that the United States sought to restrain the Korean military — Carter’s top officials assured the Korean generals that they would not oppose his plans to use military troops against pro-democracy demonstrations in the days before his May 17 coup.

Documents I obtained from the Defense Intelligence Agency demolished the official U.S. story on the deployment of the Special Forces. For years, the U.S. government had held that it had no knowledge of Chun’s decisions to use these forces. But the DIA cables showed otherwise: U.S. officials were aware long before Kwangju that the Korean military was planning to use Special Forces against unarmed student and worker protests. Those findings were crucial because two brigades of those Special Forces were later held responsible for the killing in Kwangju.

My stories were a sensation in South Korea. The day after they were published in February 1996, student demonstrations took place in front of the U.S. Embassy in Seoul and in many other cities; for days they were front page news. But The New York Times, whose bureau chief in Tokyo at the time was Nicholas Kristof (who later won a Pulitzer for his coverage of China’s Tiananmen Square massacre) completely ignored the cables, as did The Los Angeles Times.

I was later told by reporters from both papers that U.S. embassy officials in Tokyo and Seoul informed their editors that there was “nothing new” in the cables; they dutifully followed that self-serving (and absolutely false) advice and never once mentioned the new information. As a result, the U.S. media and U.S. policymakers never absorbed the lessons from the unclassified documents (to its credit, The Washington Post ran a story about them, but it appeared days after mine and didn’t advance the story at all).

Over the years, I gradually obtained more documentation. But until now, I had never written about the new documents. A few years ago, with the help of the National Security Archives, I obtained 10 State Department documents that had previously been released but heavily redacted. Then, after an 11-year appeals process, the CIA released to me several Top Secret reports — “finished intelligence,” it calls them — written in 1979, just as the crisis began unfolding. The documents are posted here in PDF form so they can be read by historians, journalists, and U.S. and Korean citizens interested in the truth about this incident. I will briefly review them now.

Supporting Dictators

Two of the State Department documents describe the first meetings between the Carter administration, led by then-Secretary of State Cyrus Vance, and the Korean government following Park’s assassination.

They show the extent of the disarray within the Korean government at the time, which was not surprising since Park was a dictator who had absolute power over the country. And they underscore how the Korean authorities, from the beginning of the crisis, tried to preserve the status quo (“no political reprisals against those who have worked for President Park”) while recognizing the deep public dissatisfaction with Park’s rule. They also starkly illustrate South Korea’s complete dependence on U.S. military support, goodwill, and economic assistance (it’s stunning to read the foreign minister of a sovereign country admit openly that one of five key sectors “in our political system” is “the influence of the United States”).

These meetings established what would become U.S. and Korean policy over the next six months. As I wrote in my original articles, Holbrooke and Gleysteen led an effort to help Korean authorities maintain political stability while counseling the opposition — who, Gleysteen admits in one cable, would “win decisively” an open, fair election — to “moderate” their demands for an end to military rule and open presidential elections. As Secretary Vance reiterated to the Korean foreign minister, “In any contacts that we have with the opposition, we will be careful to counsel moderation.” He added: “We will be careful not to engage in public criticism” of the government.

It’s also significant that Vance, even in his meetings with South Korea’s acting president, mentioned the pending $600 million U.S. Export Import Bank deal. This loan, which allowed the Korean government to buy US nuclear technology, was approved just one week after Kwangju. It’s sickening to see commercial business deal figuring into a meeting between a US Secretary of State and a Korean president. The nuclear deal, Vance told the president, “would have a calming effect.”

Two other documents discuss the U.S. response to the “12/12 affair” in 1979.

In December 1979, Chun Doo Hwan breached the U.S.-Korea joint command structure by unilaterally ordering Korean troops guarding the DMZ to arrest the martial law commanders in Seoul. The declassified cables about this event convey the deep U.S. unhappiness about Chun’s actions, with blunt statements from Holbrooke to the Korean ambassador in Washington (“mutual trust has been seriously damaged”). But despite the serious U.S. concerns about the breach of the command structure, Holbrooke and the rest of the administration agreed to remain silent on the subject as long as Chun maintained his promise not to seize total power — which of course he did.

In one document, Gleysteen is remarkably frank about how Chun was trying to grab power. The general, he says, “may try to extend his string-pulling role from the military to the entire government and society.” Yet in May, only weeks later, Gleysteen agreed with Chun on the necessity of using military force to quell peaceful anti-government demonstrations where the primary demand was that Chun get out of the government. Gleysteeen also said in this cable that not only would the opposition party win an election — but that if that possibility were to unfold, the military “would move to prevent it in advance or an election or by coup after the election.” Essentially, that’s what Chun did in May when he arrested Kim Dae Jung and other dissidents, and shut down parliament.

Two more documents provide the full summaries of two crucial meetings Gleysteen held with Chun and the Blue House (the Korean version of the White House) a week before Chun’s crackdown in May 1980. They are significant because they show that Gleysteen (and therefore the rest of the Carter government) knew the extent of the coming crackdown — “more than 12,000 combat police had been distributed throughout Seoul.” But it also conveys far more than previous cables how concerned Gleysteen and company were about potential violence and arrests. Despite those concerns, however, the United States was still characterizing opposition leaders as “unhelpful,” and Gleysteen promised to “talk sense” to Kim Dae Jung and his fellow dissident Kim Young Sam, both of whom got swept up in the crackdown.

The final cable, written by Gleysteen in June 1980 after another talk at the Blue House, provides the first official recognition of the rising anti-Americanism in South Korea. Significantly, however, Gleysteen’s primary concern was not students but “anti-American maneuvering within the regime.” In his meeting, Gleysteen was told in advance of the massive purges (in business, labor and academia) carried out by Chun during the summer of 1980. “The military authorities were not yet satisfied that they had cleansed the political scene adequately,” he says in one chilling statement, but the Blue House “was confident the surgery would not be carried to extremes.”

Despite this knowledge, the Carter administration remained silent about these actions — just as it was about Kwangju. There can be no stronger proof of the U.S. complicity in this sorry chapter in American diplomacy. And unfortunately, the lessons not learned in Kwangju have been repeated in too many places where the United States has concluded that its strategic economic and military interests outweigh the importance of human rights — from Baghdad to Kabul to Jakarta.
By Tim Shorrock, June 1, 2010.

▷원문 링크 http://fpif.org/the_lasting_significance_of_kwangj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