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 ‘핵무기 개발 막아라!?’ 확산되는 미국의 박정희 암살 사주설 (16)

[특별취재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내용이 전 세계에 알려진 이후 각국에서 ‘미국의 암살 사주설’이 폭넓게 번지기 시작했다.

미국이 CIA한국지부를 통해 중앙정보부장의 대통령 암살을 사주했으리라는 가장 큰 이유는 인권과 핵 개발 문제였다.

박정희가 지미 카터 대통령과 2년여동안 대립각을 세웠던 이슈는 주한미군 철수, 인권, 핵무기 개발 등 세가지였다.

이 중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보다 명확한 안전장치가 나올 때까지 철군을 유보하는 것으로 결론났다. 반면 인권문제와 핵무기 개발 문제는 박대통령이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1979년 6월말 정상회담 이후 하반기 들어서도 이 두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돼온 상황에서 암살됐기 때문에 ‘미국의 사주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위키리크스가 입수한 1979년 11월 2일자 타이페이 영사관의 전문을 보면 세계 각국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인지 짐작케 해주고 있다.

인디펜던스이브닝포스트(Independence Evening Post)는 “미국의 사건 개입에 대한 부인이 의혹을 불러일으킨다”고 강조했다.

인디펜던스이브닝포스트는 “김영삼의 축출,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적인 정책에 대한 워싱턴의 강한 반응, 미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의 적극적인 의지표명과 부산과 마산의 폭동(부마항쟁)에 이은 암살로 이어지는 전개 국면을 봤을 때, 미국을 염두에 두는 것은 타당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인디펜던스이브닝포스트는 특히 고 딘 디엠과 살바도르 아옌데,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이란의 왕, 그리고 시아누크 왕자의 운명을 되새겼다.

차이나포스트와 그 외 신문들은 쿠바의 통신사 보도를 빌어 ‘암살이 워싱턴의 사전 인지 하에 일어났다는 증거가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모스크바 통신사는 “미국 CIA의 직접 지시를 받은 한국의 비밀경찰이 박정희를 쐈다”고 타전했다.

미국과 한국 내 정권 핵심부에서는 ‘핵무기 개발’ 문제로 CIA가 사주했을 가능성이 번져가고 있었다. 핵 개발 문제는 양국 정권의 소수 핵심층만이 알고 있던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진행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암호명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였다. 박 대통령은 1969년 7월 닉슨의 ‘괌 독트린’ 이후 미국의 한반도 방어구상이 철회되고, 1971년 주한미군 7사단의 철군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안보와 정권 유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적극적으로 핵무기 개발 계획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국방과학연구소와 함께 비밀리에 무기개발위원회를 만들었고, 무기개발위원회에서 핵무기 개발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압록강까지 갈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탄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핵무기 개발을 위한 핵심기술 도입을 둘러싸고 미국과 한국의 갈등이 시작됐다.

당시 우리 정부는 해외에서 활약 중이던 관련 과학자들을 유치하고, 연구용 원자로는 캐나다에, 핵연료 재처리 시설은 프랑스 상고방사에 의뢰했다. 특히 1973년 9월 정부 고위관계자가 상고방사를 방문해 공장건설 계약을 합의하고, 1975년 4월 재처리 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됐다.

미국의 방해가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박 정권에게 1975년 ‘핵확산 금지 조약(NPT)’을 비준하도록 하고, 프랑스에는 재처리 시설을 판매하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설득과 협박도 계속됐다.

1976년 1월에는 미국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을 방문해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을 대표로 한 우리 측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이 회의를 계기로 한국은 프랑스로부터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하겠다고 밝힌다.

하지만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의 눈을 피해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확보하는 사업은 1976년 1월말 ‘화학처리 대체사업’으로 바뀌었고, 1976년 12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대덕에 개발을 위한 별도의 공단을 조성했다.

하지만 미국 관리들은 수시로 공단을 방문해 개발 현황을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1977년 들어선 카터 행정부는 수출입은행에 대한 고리 2호기 건설에 대한 금융지원 보류를 결의하는 등 박 정권에 대한 압박을 계속 높여갔다.

이 기간 중 한국은 그 동안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으로부터 획득한 핵 관련 시설들을 짜깁기해 국산화를 시도했다. 당시 대덕 공단에서는 원자로 설계 기술, 핵연료 설계 및 제작 기술, 농축․재처리 등 기술 연구가 이뤄졌고, 1970년대 말에는 ‘농축․재처리’ 기술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기술자립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사업은 1981년까지 완료할 예정이었으나, 미국의 방해로 프랑스로부터 시설 도입이 늦어지면서 1983년으로 목표가 수정됐다. 당시 관계자들은 박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 10월에는 설계가 모두 끝난 상태였고 박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1985년께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 계획은 박정희가 피살당한 후 등장한 전두환 정권이 핵개발을 포기하면서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특별취재팀= 최정미, 최석진, 이정우 기자]


■ 1979년 10월 25일–31일 기간의 언론 보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은 이 기간 동안의 다른 언론 보도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는데, 신문들은 일제히 충격을 표현했고, 공산주의에 맞서 한국과 대만 관계의 결속이 지속되기를 촉구했다.
인디펜던스이브닝포스트는 강한 반응과 함께 미국의 사건 개입에 대한 부인이 의혹을 불러일으킨다고 강조했다. 이전에 모든 신문들은 보도에서 미국이 개입했거나 사전에 알았는지에 대해 부정하는 존 캐논의 말을 인용했다.

인디펜던스이브닝포스트는 김영삼의 축출,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적인 정책에 대한 워싱턴의 강한 반응, 미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의 적극적인 의지표명과 부산과 마산의 폭동(부마항쟁)에 이은 암살로 순차적인 전개 국면을 봤을 때, 미국을 염두에 두는 것은 타당한 일이라고 했다. 인디펜던스이브닝포스트는 또한 고 딘 디엠과 살바도르 아옌데,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이란의 왕, 그리고 시아누크 왕자의 운명을 되새겼다.

차이나포스트와 그 외 신문들은 쿠바의 통신사 보도를 실었는데, 암살이 워싱턴의 사전 인지 하에 일어났다는 증거가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고 전하며, 모스크바 통신사 보도는 미국 CIA의 직접 지시를 받은 한국의 비밀경찰이 박정희를 쐈다고 전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재건 노력과 예방적 차원의 미 해군 한국 출동이 1면을 장식했다.
신문들은 쑨 총리가 대만 특사로 박정희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한다.


■ REPORT FOR PERIOD OCTOBER 25-31, 1979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 CHUNG HEE OVERSHADOWED NEWS STORIES FOR THE REPORTING PERIOD, WITH NEWSPAPERS UNANIMOUSLY EXPRESSING SHOCK AND URGING CONTINUED FIRM TAIWAN-SOUTH KOREA TIES, PARTICULARLY AGAINST COMMUNISM.

IN A STRONG REACTION THE INDEPENDENCE EVENING POST ASSERTED THAT U.S. DENIALS OF INVOLVEMENT AROUSED SUSPICION. IN EARLIER STORIES ALL PAPERS QUOTED JOHN CANNON AS DENYING UNITED STATES INVOLVEMENT OR PRIOR KNOWLEDGE.

IEP SAID IT WAS “LOGICAL” TO CONSIDER THE UNITED STATES BECAUSE OF SEQUENTIAL DEVELOPMENTS INCLUDING THE OUSTING OF KIM YOUNG SAM; WASHINGTON’S “STRONG REACTIONS” TO THE PARK REGIME’S UNDEMOCRATIC POLICIES; AMBASSADOR WILLIAM GLEYSTEEN’S “ACTIVE DEMONSTRATIONS” AND PUSAN AND MUSAN RIOTS PRECEDING THE ASSASSINATION. IEP ALSO RECALLED THE FATES OF NGO DINH DIEM, SALVADOR ALLENDE, ANASTASIO SOMOZA, THE SHAH OF IRAN AND PRINCE SIHANOUK.

THE CHINA POST AND SOME OTHER PAPERS CARRIED A WIRE SERVICE STORY FROM CUBA STATING THERE IS “GROWING EVIDENCE” THE ASSASSINATION WAS CARRIED OUT “WITH WASHINGTON’S KNOWLEDGE,” AND ANOTHER WIRE STORY FROM MOSCOW SAYING PARK WAS SHOT BY SOUTH KOREAN SECRET POLICE ACTING DIRECTLY UNDER GUIDANCE OF THE U.S. CIA.

READJUSTMENT EFFORTS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ND PRECAUTIONARY MOVES OF U.S. NAVAL FORCES TOWARD KOREA RECEIVED PAGE ONE TREATMENT.
NEWSPAPERS SAID PREMIER SUN WOULD ATTEND PARK’S FUNERAL AS A SPECIAL ENVOY FROM TAIWAN.

▶원문 링크 https://www.wikileaks.org/plusd/cables/1979AITTA04025_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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