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최규하 대통령 ‘2원집정부제’에 대한 정치권의 반발.. 무대 뒤에서 진행되는 신군부의 음모

[특별취재팀] 1980년 초 한겨울이 지나면서 대통령 직선제 민주화를 위한 열망도 번져갔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을 중심으로 ‘NOT 직선제’ 방안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서 정치권은 격론에 휘말려갔다.

대통령의 권한을 국무총리와 둘로 나눈 ‘2원집정부제’ 안은 직선 대통령에 출마하려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을 크게 자극했다.

최규하 정부는 ‘분파적인 정치인들에게 헌법 개정문제를 맡기면 아무런 결실도 내지 못한치 장기간 싸움만 계속할 것’이라며, 법제처에 헌법연구반을 설치해 정부가 개헌작업을 주도해나가겠다고 했다.

이같은 최규하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3김은 “최규하 대통령-신현확 총리가 헛된 꿈을 꾸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전두환의 꼭두각시’ 쯤으로 여겼던 최 대통령이 이같은 의욕을 보이는 것에 대해 깜짝 놀랐다. 미국 대사관 간부들은 최 대통령이 무슨 시나리오로 이같은 구상을 추진하는지 다각적으로 정보를 파악하려 했다.

미국은 최 대통령- 신 총리- 전두환의 역학관계, 또는 김영삼, 김종필 씨와의 막후 밀약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기용한 내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최 대통령은 강력한 인물인 신현확을 총리로 기용하고, 현실적인 자유주의자 박동진을 외무장관에 유임시키는 한편 문교장관에 여성인 김옥길을 앉혔다. 남성우위 사회에서 이화여대 총장으로 있으면서, 그녀는 개방적인 사고와 현실적 여건을 적절히 조화시킨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인사다. 그녀는 학원의 과격세력들을 진정시키고 정부의 규제 완화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취한 인선도 있다. 주영복 국방장관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인물인데, 그는 한국군을 통제할 비중 있는 인물도 아니고 전두환 장군을 견제할 능력도 없다.”

서울은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신현확 총리는 “헌법 개정 작업을 조속히 마무리 짓고 1981년 초에는 새로운 헌법에 의거한 선거를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최 대통령은 김영삼 야당 총재 등 각계 인사들과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언론검열은 완화됐고, 대학들도 3월 1일을 기해 다시 문을 열고 학생들이 요구해 온 시위와 자치권 일부가 허용됐다. 김대중은 3월 1일 공민권이 완전히 복권돼 정치적 자유를 되찾았다.

최 대통령은 12 · 12 이전보다 계엄령 해제에 적극성을 보였다. 헌법개정에 관한 자유로운 논의가 가능하도록 조속히 해제 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봄에 분출될 것으로 예상되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물결이 지난 후로 연기하자는 군부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했다.

1980년초 청와대에서 대화를
나누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

▶미 대사 “김대중 새로운 상황에 대해 낙관적 인식” 평가

대부분의 기존 정치지도자들은 12·12의 여파에 대해 ‘생각보다 덜 걱정하는 듯’했다. (그것은 몇 개월 후 그들을 감싸게 될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특히 글라이스틴 대사의 눈에 김대중은 신군부세력과 정치 상황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낙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글라이스틴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박정희 정권의 최대 희생자였던 김대중은 박대통령의 암살로 인한 구세력들의 몰락과 전두환의 권력 장악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는 은밀히 사람 만나는 일을 계속했다. 그도 다른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계엄령이 조속히 해제되지 않는 것에 실망하고 있다. 그러나 최대통령이 제시한 정치일정을 그 정도면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정부가 민주발전 과정을 진행시키는 동안은 국민들, 특히 학생들도 인내심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여당인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와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12·12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정부가 개혁작업을 차질 없이 진행시킨다면 학생과 노동자들의 동요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3김 모두는 자신들이 차기 대통령이 될 전망을 점치기 바빴다.

김종필은 부패 혐의에 노출될 위험 때문에 12·12 이전보다는 공세적 자세를 누그러뜨렸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이 야권 지지표를 분산시키는 경우 자신에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영삼은 현직 야당 총재라는 이점을 살려 야당 당수직을 유지하려 한 반면 김대중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개혁주의자라는 인기를 살려 야당 당권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상대방을 자신의 정적으로 여기면서도 정보기관들이 야당 내에 분파주의를 형성해 여당 후보의 당선을 도모한다고 정부를 공격했다.

정치지도자들은 민주발전의 전망을 밝게 하고 군부의 정치권 간섭을 막기 위해서는 인내와 자제가 필요하다고 추종세력들을 다독거렸다. 국민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들의 말을 따랐다.

▶김옥길 장관, 좌우 양쪽으로부터 협공받다

1980년 겨울도 다 갈 무렵 한국은 국제적인 에너지 위기와 정부의 투자정책 실패로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던 때였다.

노동자들은 물가고로 인한 소득감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가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대대적인 시위를 자제하면서 정부의 환율인상과 에너지 가격인상으로 빚어진 실질소득의 감소를 감내했다.

학생들도 3월 1일 학교 문이 다시 열렸을 때 웅성거리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아직 비교적 조용했다.

김옥길 장관은 박정권 시절 축출된 교수와 학생들을 학원으로 복귀시키고,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학생 자위대를 무마시키는 한편,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하지 않고 학내에서 비폭력적 시위만 하도록 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사령관은 최대통령과 신총리, 주영복 국방장관 및 고위 군 지휘관을 만날 때면 김옥길 장관을 적극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장관과 그녀의 과감한 전력은 명맥을 유지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긴장이 고조되면서 그녀는 좌우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았다.

그나마 학생들이 마지못해 자제하고 있었던 것은 정부 내 강경론자와 부모, 정치인, 그리고 기타 사회 여러 분야에서 이구동성으로 인내를 촉구하고 폭력적인 대치 상황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헌법개정의 주도권을 둘러싼 논란도 극심한 대립을 피하고 서로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김영삼은 하지만 지역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생각을 대변해 ‘헌법개정은 국회가 주도해 지체 없이 진행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최규하 정부가 공연히 시간만 지연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여망을 저버리는 ‘반동적인’ 행태”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최 대통령과 신 총리는 정부 주도의 개헌작업을 하겠다는 원칙에서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무대 앞에서 정부와 정치인들이 탁상공론을 하는 동안 무대 뒤편에서는 전두환 신군부의 음모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특별취재팀= 최정미, 최석진, 박정우 기자]

<참조 문서>
https://wikileaks.org/plusd/cables/1979SEOUL19408_e.html

https://wikileaks.org/plusd/cables/1979SEOUL19204_e.html

https://wikileaks.org/plusd/cables/1979STATE281946_e.html

https://wikileaks.org/plusd/cables/1979SEOUL19088_e.html

http//wikileaks.org/plusd/cables/1979STATE320837_e.html

▷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 William Gleys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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