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 군사적 카드로 신군부 ‘민주개혁’ 압박한 미국… 전두환 ‘베시 장군 방한해달라’ 우회공격(25)

[특별취재팀] 1980년 5월 광주항쟁으로 정부와 시민들의 대립 양상이 첨예화되기까지 미국은 전두환 일파에 의해 드리워진 암운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민주발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이같은 기대에 백악관과 국방부, 국무부, 주한미대사관은 전두환의 정치 관여를 저지 내지는 늦추고 최규하 대통령의 민주개혁 노력을 돕기 위해 군의 본연의 임무로 복귀시킬 방법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위컴 사령관과 그의 막료들은 한국군을 상대로 선교사적 임무(민주화 필요성)를 수행하면서 대사관에도 결과를 알리면서 가끔 군 모임에 대사관 수뇌진을 동석시켰다. 그들은 신임 주영복 국방장관과 다른 신군부 세력을 만날 때마다 카터 대통령의 친서에 담긴 의미를 주지시키곤 했다.

발언의 무게를 더하기 위해 미대사관과 연합사 수뇌진은 실행 가능한 제재방법을 신중히 검토했다.

위컴은 미국의 한국 내 군사계획 중 취소나 연기시킬 대상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군사기술 협력, 미사일 개발, 정보 공유, 한국 측이 희망하는 ‘평화시 주한미군의 작전권을 한미연합사 관할로 이관하는 문제’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그 외 대상으로는 F-5E 전투기의 공동생산과 F-16기의 구매와 연례한미안보협의회가 있었다.

워싱턴에서 가능한 제재방법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자 위컴 사령관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각기 사전 조율된 회신을 보냈다.

글라이스틴은 한국 국민들 눈에 ‘반(反)12 · 12’가 아닌 ‘반한(反韓)’으로 비쳐질 방법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F-5E와 F-16기의 공급 계획에 차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위컴의 제안을 지지했다.

또한 전두환 그룹이 12·12 당일 연합사와 통제권을 무시한 행위에 대해 제재를 가하려는 마당에 평화 시 주한미군의 작전권 관할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했다.

최종 건의는 아니었지만 글라이스틴은 차기 한미안보협의회의를 연기하거나 취소시키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고 밝혔다.

워싱턴에서는 서울 현장의 접근 방식에 대체적으로 찬성하고 강경 제재조치는 피했다.

카터 대통령은 최 대통령에게 강경 친서를 보낸데 이어 작전권의 변경문제 논의를 연기했으며 몇몇 협조계획의 실시를 늦추고 연례안보협의회의 일정 조정을 연기시켰다. 그런 제재 방법들이 내용면에서는 온건한 것들이었지만 전두환에 대한 미국의 냉담한 태도로 효과는 확대됐다.

미국은 신군부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업무연락은 12 · 12 이전의 경로를 통했다. 한 예로 위컴은 전두환과 만나는 일을 거의 2개월이나 지연시켰다.

이런 냉담한 태도에 반감을 품은 전두환은 서울에 주재하는 골치 아픈 미국 관리들을 피하는 우회전술을 택했다.

그는 한 신망 높은 장성을 자신의 메신저로 활용, 워싱턴에서 육군참모차장을 맡고 있던 베시 장군 및 미군 고위 장성들에게 편지를 보내 베시 장군이 서울을 방문하든가 자신이 워싱턴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위컴은 베시에게 전두환에게 이용당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글라이스틴도 ‘미국에서 고위 장성이 방한하면 전두환의 행동을 미국이 받아들이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반대했다.

베시는 전두환이 보낸 메신저에게 전두환은 정치에 관여할 생각은 말고 본연의 일에 복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대사관은 정부, 정당, 언론, 재계, 교회, 노조, 대학 등 한국 각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미국의 정책을 알리기 위해 대대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만나는 대상에 다라 메시지의 내용을 조절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12·12 사태를 위험한 사태로 비판하고 헌정과 민주발전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했다. 정부 측에 대해서는 군대 내에 더 이상의 불안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민간정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조속한 헌법개정과 정치인들과의 협의, 검열 완화, 계엄령 해제, 김대중의 완전한 복권 등 순조로운 정치개혁을 촉구했다.

재야인사들과 기존 정치인들과의 만남에서는 미국이 한국 정부에 요구한 사항을 알려주면서 인내를 부탁했다. 글라이스틴은 특히 한국의 중견 언론인들과 매주 기자회견을 열어 배경설명을 했다.

1980년 1월과 2월에 걸쳐 국무부의 홀브룩과 아마코스트, 신임 태평양함대사령관 로버트 롱 제독, 레스터 월프 의원이 이끄는 의회사절단이 서울을 방문했다. 그들은 최대통령과 한국측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행정부와 의회, 민간인과 군부를 막론하고 미국의 여론은 한결같다는 점을 강력히 주지시켰다.

브라운 국방장관은 베이징 방문길에 잠시 도쿄에 머물면서 글라이스틴 대사를 불러 한국의 상황을 브리핑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한국의 정국불안을 틈타 북한이 무모한 짓을 하지 않도록 중국 측에 당부할 예정이었다.

이같은 숨은 노력의 결과로 군부의 정권 인수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은 한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최 대통령이 개혁 추진을 약속한 것과, 신군부 지도자들이 입으로나마 현재의 민간정부와 민주주의 지지를 발표한 일, 그리고 학생과 노동자들이 자제해 준 결과였다. 어느 정도나마 정치적 낙관론이 다시 고개를 들어 국민들은 ‘서울의 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군부가 정권장악을 포기한 게 아니라 속도를 조절한데 불과한 것이기도 했다.

[특별취재팀= 최정미, 최석진, 박종하 기자]

<참조 문서>
https://wikileaks.org/plusd/cables/1979SEOUL19408_e.html

https://wikileaks.org/plusd/cables/1979SEOUL19204_e.html

https://wikileaks.org/plusd/cables/1979STATE281946_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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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 William Gleysteen